“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내 가치는 내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버질 아블로는 패션계의 정석을 밟은 패션 학도가 아니었는데요,
그런 그가 어떻게 패션 세계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되었을까요?
장벽을 허물다:
버질은 아프리카 가나 출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미국 대학에서 토목공학과 건축학을 전공했죠. 심지어 1940년대와 1950년대 유명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건축학과의 수장으로 있어 건축계에서는 익히 알려진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에서 건축 석사를 마쳤습니다. 한마디로 패션 디자이너로서 전형적인 코스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시카고에서 자라면서 힙합을 듣고,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고, 스니커즈와 나이키, 그래피티, 스케이트 보드 문화를 즐기면서 자라 자연스럽게 “스트릿함”이 그의 미학을 완성하는 근본이 되었죠.
스트릿웨어 컬쳐에 빠지게 되면서 2012년에 시작한 패션 프로젝트 파이렉스(PYREX)를 런칭해 프린팅 기계를 이용한 자신만의 프린트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 그 과정에서 가수 칸예 웨스트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칸예 웨스트의 머천다이즈, 앨범, 투어 굿즈, 무대 세트 등의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기존 창조물에 3% 변화를 부여해 새 디자인을 만들다:
버질 아블로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디자이너라고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개념을 더하는 현대 미술의 한 장르인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실제로 그도 자신의 디자인 철학은 기존의 것에서 3%정도만 바꾸고 뒤틀어 재밌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라 밝힌 바가 있죠.
과거 화장실 변기로 만든 마르셀 뒤샹의 작품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원래 있던 셔츠보다 수십 배 비싸진 파이렉스의 제품은 많은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기 없던 폴로 셔츠가 몇배의 가격에 팔렸으니 그럴만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입으면서 브랜드는 점차 유명해졌고, 버질도 유명새를 현명하게 잘 활용했지만 파이렉스의 셔츠가 전세계적인 유행템이 되고 브랜드의 주가가 점점 올라가는 시점에서 버질은 박수 칠 때 떠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브랜드보다는 프로젝트의 개념에 더 가까웠던 파이렉스 비전을 1년 만에 접었죠.
이런 그의 철학은 루이비통의 수장이 되었을 때에도 작용을 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하거나 엉뚱한 것을 덧붙이는 식의 ‘조금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 하이엔드 브랜드의 정교한 컬렉션에 스트릿웨어의 다채로운 감성을 적용하여 정체된 루이비통 남성복에 활력을 불어 넣었죠. 새로운 것보다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버질의 패션 철학이었습니다.
파격적인 협업 바운더리:
2013년, 파이렉스(PYREX)의 종지부를 찍은 후, 버질 아블로는 하이엔드 스트릿 패션 브랜드 ‘오프화이트(Off-White)’를 시작하고, 2018년에는 흑인 최초로 루이비통의 남성복 총괄 디렉터까지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죠. 딱히 유난을 떨었던 디자이너도 아니었는데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약 7백만명에 육박하고, 심지어 DJ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이슈 메이커이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버질은 루이비통을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하이엔드와 스트릿의 조화를 이루어내며 패션의 새로운 장을 열었죠. 그의 지속적인 스트리트 패션과 하이패션의 융합과 재해석이 바로 수많은 스트리트 패션 메이커들과 아블로가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지점일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이키, 메르세데스 벤츠, 이케아, 비트라, 컨버스, 크롬하츠, 지미추, 바이레도, 모엣샹동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수많은 협업을 하며 패션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고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시도를선보였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전시까지 성사시켰죠. 그는 협업의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배경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것을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며,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