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 8월부터 조각투자 상품 제도권 편입
미술품·한우·부동산·명품·저작권 등 활용 가치 ‘무궁무진’
미술품 조각투자 플랫폼 ‘아트투게더’를 운영하는 투게더아트는 최근 금융감독원에 투자계약증권 증권신고서를 제출했다. 7억9000만원을 공모로 조달해 미국 스탠리 휘트니 회화 작품 《스테이송61(Stay Song 61)》을 취득·관리하고, 10년 이내에 작품을 처분해 투자자에게 청산 손익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증권신고서가 금감원 심사를 통과하면 금융 당국이 심사한 첫 번째 조각투자 상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업체들도 조각투자 관련 증권신고서 제출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 출시를 준비 중인 조각투자 상품은 미술품과 음악저작권, 부동산, 명품, 한우, 귀금속 등 다양하다. 미술품의 경우 미술품 조각투자 플랫폼 아트앤가이드를 운영하는 열매컴퍼니와 조각투자 플랫폼 소투를 운영하는 서울옥션블루가 조각투자 상품 출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이 6월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우리 기업에 힘이 되는 증권형 토큰(STO)’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뮤직카우가 촉발한 ‘증권성’ 논란
한우 투자플랫폼 뱅카우를 운영하는 스탁키퍼와 명품에 조각투자하는 트레져러 역시 조만간 금감원에 투자계약증권 증권신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음악 조각투자 플랫폼 뮤직카우는 조만간 수익증권 형태로 음악 조각투자 서비스를 재개할 방침이다. 뮤직카우는 현재 금융사를 통한 신탁 단계를 완료했으며, 전자등록 전 사전심사를 위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부동산 조각투자업체 카사의 경우 9월6일부터 사흘간 총 167억원 규모의 ‘압구정 커머스 빌딩’에 대한 공모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렇듯 조각투자 상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질 기세다. 금융 당국이 올해 8월부터 투자금융계약이라는 기존 증권신고서 양식을 활용해 합법적으로 조각투자 상품을 출시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뮤직카우 논란이 계기가 됐다. 2016년 설립된 뮤직카우는 음악 저작권에 조각투자하는 플랫폼을 출시했고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누적 회원 수는 2018년 1만 명에서 2019년 4만2000명, 2020년 22만8000명, 2021년 91만5000명, 2022년 12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회원이 늘어난 만큼 논란도 커져갔다. 뮤직카우가 투자자에게 분할매각한 ‘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이 증권에 해당하는 만큼, 자본시장법 위반이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해 4월 뮤직카우의 저작권료 참여청구권이 증권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11월에는 한우와 미술품에 대한 조각투자 상품 역시 증권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다수의 조각투자 업체가 사실상 거래를 중단했다. 금융 당국은 이들 조각투자 업체를 제도권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금융 당국은 제재 절차를 유예했고, 조각투자 업체들에 사업구조 재편 및 투자자 보호장치 등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2009년 2월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도입된 투자계약증권 제도를 근거로 삼았다.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증권은 지분증권·채무증권·파생결합증권·증권예탁증권·수익증권·투자계약증권 등 총 6가지로 구분됐다. 지분증권·채무증권·파생결합증권·증권예탁증권은 기존부터 널리 활용됐던 증권이지만 투자계약증권은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투자계약증권이란 공동사업에 금전을 투자하고 주로 타인이 수행한 공동사업 결과에 따라 손익을 받는 계약상 권리를 말한다. 주식이나 펀드와 달리 상장사가 아니더라도 일반 법인이 자율기재 방식으로 신고서를 제출하면 발행할 수 있다. 하지만 만기 전 자금 회수가 안 되고 의결권도 없으며 개개인이 거래할 수 있는 유통시장도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발행된 적이 없고 법으로만 존재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7월말 투자계약증권 증권신고서 양식을 전면 개정했다. 이를 통해 조각투자 업체들은 양식에 따라 투자계약증권을 신고하고 금감원이 이를 허가하면 조각투자 상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각투자 시장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토큰증권(STO) 제도가 도입되면 본격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금융업계는 보고 있다. 현재 조각투자 상품은 한 회사가 상품의 발행·유통을 함께 맡아서 할 수 있지만 토큰증권은 발행사와 유통사가 같을 경우 이해충돌 우려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 당국은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을 분리할 예정이다. 이미 금융위원회는 지난 2월 자본시장법·전자증권법을 개정해 토큰증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발행·유통과 관련한 계좌관리기관·장외거래중개업을 신설하는 내용이 담긴 ‘토큰증권 발행·유통 규율체계 정비방안’을 발표한 상태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은 토큰증권을 전자증권의 한 유형으로 인정해 발행·유통 등 관련 시장을 자본시장법 적용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이 담긴 전자증권법·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이 공포되면 1년 후 시행되는데, 당정은 연내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2024년 말~2025년 초부터 국내에서도 토큰증권 시장이 본격 출범하는 셈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발표한 글로벌 시장 전망을 토대로 추정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토큰증권 시장 시가총액은 2024년 34조원에서 2025년 119조원, 2030년 36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증권사들도 시장 선점 위해 안간힘
국내 증권사들 입장에서도 토큰증권 시장은 새로운 먹거리다. 시장 선점을 위해 사전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가상화폐 거래소 업비트가 돈을 쓸어담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주요 증권사들은 기존 조각투자 업체들은 물론이고, 금융 및 통신기업들과 손잡고 합종연횡에 주력하고 있다. NH투자증권의 경우 ‘STO 비전그룹’을 구성하고 8월7일 토큰증권 기반 조각투자 사업자 지원을 위한 ‘투자계약증권 올인원 서비스’를 선보인 상태다. 다른 증권사들도 마찬가지로 서비스 출범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변수는 있다. 토큰증권 시장의 성장세를 결정할 중요 요인으로 세금과 개인별 연간 투자한도가 꼽힌다. 정부는 아직 조각투자 수익에 대한 과세 기준을 정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와 국세청은 이와 관련한 법령 유권해석을 하고 있다. 금융 당국이 개인별 연간 투자한도를 얼마로 제한하느냐도 전체 토큰증권 시장 규모를 결정할 핵심 규제로 분석된다. 현재 미술품·한우 조각투자는 연간 투자한도가 따로 정해진 바 없으며 한시적 특례 제도인 혁신금융서비스(금융샌드박스)를 통해 조건부 인가를 받은 부동산·음악 저작권 조각투자 업체들은 연간 2000만원 한도를 적용받고 있어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